단국대학교 분쟁해결연구센터는 1990년 이후 한국 사회에 발생한 공공 갈등 사례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하고 있는데, 매월 발행되는 뉴스레터에 현재의 한국 상황과 유사한 공공갈등 사례들을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핵 협상이 2026년 2월 6일 오만 무스카트에서 재개되었지만 결렬된 이후 11일 만인 2월 17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두 번째 핵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후 3차 핵협상이 2월 26일부터 진행 중이었지만,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미국-이란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3월 14일 한국을 비롯한 중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의 국가에게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참여연대를 비롯한 한국의 시민단체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군을 파견해 교민과 우리 기업의 보호와 안전 보장이라는 의무를 방기하고 이란의 공격 타깃이 되겠다는 결정을 누구도 납득할 수 없으며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1990년 8월부터 제1차 걸프전쟁이 종료되는 1991년 2월까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걸프전 파병 관련 분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래는 분쟁해결연구센터 ‘공공갈등 DB’에 수록된 ‘걸프전 파병 관련 분쟁’의 일부분이다.
<‘걸프전 파병 관련 분쟁’의 일부 경위> 1990년 8월 8일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유종하 외무차관을 만나 대이라크 제재에 동참하도록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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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7일 니콜라스 브래디 미 재무부 장관이 방문해 걸프 사태에 대한 분담금을 협의했다. 1990년 9월 24일 유종하 외무차관은 미국의 군사비 분담 및 인접국 지원금을 합쳐 2억 2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발표했다. 그리고 병력 파견을 하지 않는 대신 의료단의 파견을 검토하기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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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17일 걸프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날 연세대 100여 명은 교문 앞에서 걸프전 파병 결사반대 시위를 했고 서울대 총학생회는 걸프전 개전에 관한 반전·반미 대자보를 붙이고 ‘걸프 전쟁은 중동 지역에서 경제 수탈을 더 강화하려는 미국에 의해 도발된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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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1일 152회 임시국회가 개회되었고 이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에 대한 국군 의료진 파견 동의안’을 의결하고 찬성 223표 반대 9표 기권 2표로 파견 동의안이 통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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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2일 서총련 소속 대학생 2천여 명은 5개 대학에 모여 ‘걸프전쟁 파병 결사 저지를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영등포역·홍익대 근처·성균관대 앞·병동 제일백화점 일대 등 도심지 곳곳에서 기습 거리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맞서 화염병 등을 던지는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수원 지역 대학생협의회 학생 300여 명은 수원역 광장에서 ‘반전과 민자당 해체’ 등을 요구하는 기습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부산·동아·경북·전남·전북·원광대 등 대학생들도 교내 및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이날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 등 1,230명을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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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3일 국군의료지원단 134명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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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8일 전민련 소속 대학생 100여명은 ‘걸프전 파병 반대’, ‘현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암경찰서 동양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 50여 개를 던져 파출소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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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25일 서울대·연세대·전남대 등 전국 16개대학생 4천여 명은 각 대학별로 걸프전 파병 반대 집회를 갖고 도심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이날 시위 현장에서 학생 300여 명을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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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28일 부시 미 대통령이 걸프전 종전 성명을 발표하면서, ‘걸프전 파병 관련 분쟁’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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